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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식

한국음식의 뿌리 스토리

by 포미for-me 202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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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고대에는 한반도와 만주 등지에 정착하여 살게 되면서 

원시적 채집, 어로와 수렵 등으로 얻은 

다양한 식재료들을 화력을 사용하여 조리를 해 먹던 

그 시대 한국음식의 역사의 뿌리를

 찾아 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그 시대 원시적 식습관 생활이 지금 와서 

한국음식 요리에서 볼 수 있는 특색을 존재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음식의 특색이라면 

농어촌 중심의 일상 생활권인 정주 생활이 활성화되면서 

농경이 점진적을 발달하고 한민족이 한반도의 

자연환경과 사회 환경이 다양하게 융화 되어 가면서
그때부터 한국 요리가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연이 아닐 것입니다.

한국지역 환경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고 남북으로 뻗어 있는 

산맥 그리고 남부와 북부 그리고 중부의 기온차가 
뚜렷하니 자연히 다양한 식물이 자라나고 농산물의 

가지각색 많아지고 바다가 있으니 좋은 어장이 주변에
흔하게 볼 수 있어서 어로 잡이 배들이 점차 발전하게 되었으며 

생선류도 다양해져서 굴, 조개, 소라, 멍게, 성게, 해삼,
게, 전복, 오징어, 새우 등 종류가 많아지고 해조류인 

파래, 김, 다시마, 미역 등 수렵 채취도 매우 활성화했다는
기록이 뿐만 아니라 농경이 자리를 잡아 감에 따라 

가축을 기르는 일이 늘어나게 되면서 소, 토끼, 염소, 돼지
, 닭 등을 길러 고기로 먹으며 고기를 사용 요리법이

 매우 잘 되어 있다는 기록도 엿볼 수 있습니다.
산야에 자라나는 각종 식물들이 다양한 종류의 

나물이며 밭에 재배하고 가꾸는 채소 들로 인해
좀 더 풍성해진 채식 위주의
조리법이 생겨 나고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삼국시대와 백제

이미 삼국 시대에 기록을 보면 한국인 만의 특색 있는 

요리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신문왕이 일길찬 김흠운의 작은 딸을 아내로 

맞이하기 하기 위해 우선 이찬 문영과

차진찬 삼광을 보내 혼인할 날 즉 기일을 

정해서 오고 대아찬 지상을 보내 신부 될 

사람의 집에 혼인을 청하는 의례인

납체를 하게 되었고 

예물로 보내는 쌀, 기름, 꿀, 포, 간장, 

된장, 비단이 15 수레와 젓갈이 

1백3십5 수레를 했다는 기록은
신라의 국왕이 혼례를 할 얼마나 많은 양의 

음식을 했는지를 볼 수 있으며, 

고대 삼국시대 때를 한국인의
음식 습관이 쌀 그리고 쌀로 토대로 발효시킨 

술과 식혜가 있으며 음식에 할 때 필요한 

간장, 된장, 기름과 꿀을 많이 애용했으며

 포는 일반적으로 말린 고기인 육포와 

생선으로 포를 뜬 어포가 있었으며 
단순히 보존식품으로 보는 게 아니라 

공식적인 왕의 혼례에서 등장했을 정도로 

그때 당시에 일반적인 음식 중 하나라 할 수 있으며

 강원도 고성에 운반해온 가물치, 젓갈, 전복, 

동물들의 내장, 돼지고기 등으로
다양한 식재료를 했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백제인들은 주로 육식보다는 

채식과 민물고기를 즐겼다는 것을 왕궁리

 유적의 화장실 유적을 통해서
역 볼 수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불교국가인 탓에 고려는 

육식문화가 쇠퇴하고 있었고 

송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는 고기를
올려야 할 때에도 도축하는 방법이 

불에 던져 넣거나 구타해 죽여서 

내장이 터져서 누린내가 났다는

기록이 고려도경 제23권 접속 도 재편에 

확인됩니다.


고려시대의 보면 이자겸의 생일날에 들어온 

고기가 너무 많이 썩어 났다는 내용이 담겨 있지만 

육류를 아예 섭취를 안 하지는 않았지만 

특정한 부위의 요리가 발달
하게 되려면 소비계층이 다양하게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서 

결국 송나라 사신을 크게 대접해야 할 때

조차 누린내가 나는 고기를 

대접한 것을 봤을 때는 그 시기에 

고려의 고기 조리 방법이 얼마나 발전하지
못했는지를 기록으로 엿볼 수 있습니다. 

고조선 때에서부터 맥적 등으로 많이

 

 알려진 조리의 명맥도 고려 초 동안 

불교의 영향으로 어쩔 수 없이 육식이

 금해지면 점차 사라져 버렸으며

 지금에 온 현재 우리가 먹는 맥적이나 너비아니는

전통적인 방식이라 보기 어려운 다른 조리법의

요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해산물을 많이 즐겨 먹었다는 기록으로 

봐서 육식 대신 어류를 만이 사용했으면 

육식인 네발이 있는 동물 아닌 

새 꿩이나 닭 같은  조류와 해산물 

위 쥐의 음식을 즐겼을 거라고 

예측을 하고 있으며 

이런 것을 봐선
불교국가임에도 이자겸에게 바치는

 고기와 닭을 상으로 올리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고려 후기에 원 간섭기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고기 음식이 다시 재 유행을 하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국가적으로 볼 때 소의 도축을 법으로 엄밀히 

금하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 상당수가 소를 도축하고 
소비했으며 그러한 기록이 1844년 에서 

1849년 동안 일본에서 소가죽 수출량이 

12만 714매로 연간 2만 119 필의 소가 

도축되었고 1882년 이후에는 

청나라에 수출품 중에 최대 차지했던 것은 소가죽
이었습니다. 

전국에 하루 소 5백 필이 도축되었다는 

기록도 박제가의 북학 의가에 남아 있으며 

그 당시에 조선은 소가죽을 수출을 하지만 

쇠고기는 수출하지 않고 국내에서만 

소비한 데다가 수출용 이외의 소의 도축량을
고려하면 상당한 수의 쇠고기가 국내에 

공급되어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중근세 일본에서 조차도 쇠고기 하면 

조선이라는 인식이 있었을 정도이며 

조선 중기를 시점으로 봤을 때 불을 쓸 때에는 

믈을 적게 써서 찌느냐, 많이 써서 삶고 끓이느냐 

아니면 불을 쓰지 않고 말리느냐로 

크게 나누어 구분이 되었고
한국 조리법에 구이를 강화하기 시작하면 

불을 직접적 사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식이 가장 널리 퍼지게 된 조리방식이었던

 찜에 찌는 거나 구워서 몽 근하게 만들어 즙을

얻져 먹는 누르미를 불에 지지거나 직접 구워 

먹는 누름 적은 변화되고 바뀌고 했던 

요리의 대표되는 고기구이는 

갈비와 불고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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